칼럼

창간 70주년 충청일보를 돌아본다

조무주 2016. 3. 3. 09:13

 나이 70이면 고희(古稀)라고 말한다. 고희는 두보(杜甫)가 지은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따온 말이다. 인간은 70세까지 살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그러나 요즘은 100세 시대에 접어들어 70세도 젊은 나이라고 말한다. 보험개발원이 발표한 우리나라 평균 수명은 남자 81.4세, 여자 86.7로 남녀 모두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기고 있다.
 충청일보는 3월 1일로 창간 70주년이 된다. 사람의 나이로 고희를 맞은 것이다. 창간 70주년이 넘은 신문은 중앙지, 지방지를 통털어 몇 개 신문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는 지령 2만호도 달성했다. 지령 2만호에 창간 70주년은 충청도에서는 처음있는 일이어서 여간 자랑스럽지 않다. 100세 시대, 충청일보가 70주년이지만 젊은이 못지 않은 패기로 전진하고 있다. 인테넷 기사 검색 순위가 항상 상위권이고 지방 신문에서 흔치 않은 뉴미디어팀이 구성돼 신선하고 다양한 동영상을 방영하고 있다. 



 충청일보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창간됐다. 창간 당시의 제호는 국민일보였다. 청주라는 소도시에서 발간되지만 전국지를 지향하기 위해 이같은 제호를 사용했다. 창간호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축하 휘호가 실리는 등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한국전쟁 등으로 휴간이 잦았다. 그러다 1953년 5월 대통령을 견(犬)통령으로 오식(誤植)하는 바람에 폐간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당시는 활자를 뽑아서 인쇄하는 시스템이어서 개 견(犬)자와 큰 대(大)자를 오식하기가 쉬웠다. 그후 충청일보에 개 견자가 자취를 감추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폐간 이후 지방 신문 부재에 대한 아쉬움과 독자들의 요구로 1954년 3월 국민일보가 충북신보로 제호를 바꾸어 간행됐다. 이어 대대적인 시설 확장과 함께 1960년 8월 15일 지금의 충청일보가 되었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충청일보는 2004년 11월 노사분규로 발행이 중단되는 아픔을 또 겪어야했다. 2년여의 정간 끝에 2007년 3월 1일 속간호가 제작되면서 다시 충청도에 충청일보의 깃발을 높이 세우게 된 것이다. 충청일보는 다양한 행사로 충북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충북 최초로 앙드레김 패션쇼를 개최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김영임 쇼, 윤복희 콘서트, 주현미 콘서트, 뮤지컬 친정엄마, 컬투쇼, 싸이 콘서트 등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와 배우들이 출연한 뮤지컬, 콘서트가 잇따라 열려 충북의 대중 문화를 이끌었다. 또 충청페스티벌, 3.1절 경축 마라톤대회, 직지배 전국 볼링대회, 시군 대항 역전마라톤 대회, 미스 인터콘티넨탈 선발대회, 충청대상 시상식 등 다양한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3.1절 경축마라톤 대회와 시군 대항 역전마라톤 대회를 통해 배출된 선수들이 경부역전마라톤 대회에서 불멸의 10연패를 달성하기도 했다.
 충청일보의 사시는 '정론직필(正論直筆), 역사의 증인(證人), 창조적 사고(思考)'다. 창간 70주년을 맞아 올바른 언론으로써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론을 펴며, 지역 사회를 넘어 역사의 증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시한번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