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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유한인보 3호 일본인 손에

by 조무주 2013. 12. 4.

 국내 최초로 자유한인보 3호의 복사본이 본보 자료실에서 발견됐으나 그 원본이 일본으로 넘어간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충격적이다. 1946년 3월 1일 창간된 본보는 '창간 70년사'를 발간하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1945년 11월 15일에 발간된 '자유한인보 3호'와 '일제 강제 징병자' 명단이 실린 명부를 발견했다. 자유한인보는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로 잡힌 한인들이 주간 신문으로 발행했던 것으로 국한문 혼용의 등사본이다. 지금까지는 7호만이 발견되어 독립기념관과 국가기록원 등에 보관되고 있으나 3호가 발견되기는 처음이다.
 충청일보가 보관하고 있는 자유한인보 3호는 복사본으로 원본을 소장한 충북 보은군 탄부면 장암 2구 장갑선씨는 이미 사망했으며 그의 자녀를 수소문한 끝에 장남이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유한인보 원본과 일제 강제 징병자 명단이 10여년전 신원을 알 수 없는 일본인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장갑선씨는 2005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의 장남 장경수씨(55)는 자유한인보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평소 아버지가 이를 매우 소중하게 보관했다고 말했다. 장씨에 의하면 아버지는 경북 영주시에 살다가 징용 당해 일본을 거쳐 2차대전에 투입되어 포로로 잡혔다. 이후 하와이 포로수용소를 거쳐 한국에 돌아와 경북 영주에 정착하여 장사를 하다 결혼를 했다. 그후 고향인 보은군 탄부면으로 이사를 왔으며 이곳에서는 주로 농사를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평소 태평양전쟁과 하와이 포로수용소의 일화들에 대해 마을 주민들에게 자주 이야기했으며 그래서 그의 별명이 '하와이'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한인보와 강제 징용자 명단을 땅 문서가 있는 상자에 넣어 자물쇠로 잠궈 보관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유한인보를 원했으나 건네 주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도에 일본인이라고 밝힌 스님에게 자유한인보와 강제 징용자 명단을 넘겨줬다는 것이다. 자유한인보가 그렇게 중요한 자료라는 사실을 알면서 이를 일본인에게 넘겨줬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본보는 1991년 4월 4일자에 장씨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당시 정신대 명부가 발견됐으며 70명의 위안부 이름이 강제 징집자 명단 중에 있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또 장씨가 당시 위안부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봤다는 증언도 했다. 당시 정부나 국가기록원 등에서 자유한인보 3호와 강제 징병자 명부를 확인하고 입수했다면 이처럼 중요한 자료가 일본인 손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본이 일본인 손에 넘어갔지만 복사본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는 있다. 또 3호 이외에 1, 2, 4. 5호가 발견될 수도 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당시 강제 징용자들 대부분이 사망한 지금 원본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징병자 명단 뿐 아니라 일제 시대 작성됐던 각종 문서 등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정리하여 중요한 자료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바란다. 일본은 아직도 위안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국의 어디엔가 위안부 동원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를 찾는데도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