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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노년의 행복을 위해 투자

by 조무주 2014. 7. 15.

  1960년대만해도 우리나라 평균 수명은 52세였다. 환갑을 맞으면 장수했다고 모두들 축하했다. 그러나 지금은 환갑 잔치라는 것이 아예 사라졌으며 100세 시대가 머지 않았다고 말한다. 의학이 발달하고 건강에 관심이 많아지니 자연 수명이 연정되는 것이다. 그러면 장수하는 것이 삶의 목표일까. 그것은 아니다. 노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오래 산다고 모두 행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가 태어나면 부하가 6명 생긴다고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등이다. 그만큼 아이가 커서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아진 것이다. 이제는 자녀에게 의존해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노후 대비가 중요하다. 우리 부모들은 지금까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을 위해서는 뭐든지 했다. 자식이 잘되면 굶어도 행복하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 자식에게 투자하는 것을 줄이고 자신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충고가 설득력이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굶고 사는 사람은 없다.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니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경제가 발달하면 그에 비례해서 행복도 증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일본은 1950년과 1970년 사이에 경제 성장이 7배나 늘었다. 그러면 국민의 행복지수가 7배가 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잘 사는 것과 행복지수와는 비례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에디오피아 등 후진국이라는 사실이다. 

 

 


  10년 전 미국 하버드 대학교 성인발달연구소는 90년에 걸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60~80년 동안 각기 성격을 다른 세 집단의 유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비교 분석했다. 1920년대에 태어난 268명의 하버드대학 졸업생, 1930년대에 태어난 저소득층 거주 지역출신 청소년 456명, 1910년대에 태어난 90명의 천재 여성들이었다. 이들의 삶의 결과는 죽음의 순간에서 찾아왔다. 어떤 사람은 죽는 순간 후회와 슬픔, 두려움 속에서 죽어 가는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에 후회 없는 만족한 미소로 세상을 떠났다.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자신도 노력해 사회적으로 성공해 남들로부터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렸는데도 죽음의 순간에는 괴로워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힘든 삶을 살았음에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성장 환경이나 결과가 아니라 삶의 모습에서 마지막이 갈리는 것이다. 아무리 잘살고 똑똑하다고 해도 자신만을 위하여 산 사람은 괴로운 죽음을, 어려운 삶을 살았더라도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행복한 삶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노년의 삶이 어떻게 귀결되느냐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노후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 노년을 맞이 한다면 봉사하는 마음도 이웃에게 사랑을 펼칠 여유도 없을 것이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이웃을 돌아 보는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면 자식에게 올인하지 말고 자신에게 투자해야 한다. 죽음의 순간 행복하게 눈을 감기 위해서라도 그렇다는 것이다.